<새로운 천사의 알레고리 (Allcgorie des neuen Engcls)> 가변크기, 아크릴, 철, 모터. 와이어, 스포트라이트조명, 2025
자본주의 물질의 판타스마고리아와 보이지 않는 노동자
2025년 3월 17일, 포항의 포스코 역사관과 공장 견학을 다녀왔다. 포스크 그룹은 50개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 직원수는 44,501명이다. 그 중 포스코 포항본사의 직원 수 는 17,913명이다. 그러나 포항의 포스코를 방문하는 동안 내가 볼 수 있었던 노동자는 포스코 박물관에서 도슨트 역할을 하는 여성 직원들과 포스크 내부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임원처럼 보이는) 남성 직원, 그리고 포스코견학버스를 타고 공장을 달리는 동안 작업복을 착용하고 있는 몇 명의 노동자의 ‘뒷모습’이 전부였다. 정작 보고싶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단 몇 초동안 ‘뒷모습’으로 보았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였다. 결국 포스코를 돌아다니는 동안 합해봐야 15명 남짓한 노동자들을 봤을 뿐이다.
‘제철소에서 무엇을 보았나’라는 질문은 ‘제철소는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고 나서야 몇 개의 대답들이 떠올랐다. 정말 잘 박제된 박정희와 전세계에서 일하고 있는 제철소의 자랑스러운 직원들의 모습 (그 얼굴들에는 하급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용역노동자들은 빠져있다),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화려한 미디어파사드 영상과 아니쉬 카푸어의 빛나는 작품은 분명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자꾸 보여주지 않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
절정의 클라이막스는 1538도에서 녹은 철이 슬라브로 만들어지는 공정을 볼 수 있게 한 코스였다. 발광하는 슬라브가 컨베이어 밸트를 타고 압연과정의 롤링으로 지나 점점 얇아지는 과정은 그야말로 ‘경이롭다’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놀라운 시각적 충격이었다. 주황빛의 슬라브를 본 사람들의 함성과 굉음, 열기는 그야말로 스펙타클 그 자체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나를 실어나르는 기차와 철로, 자동자 또한 내가 공장에서 보았던 철로 만들어진 물질이며, 1538도에서 액체화가 된 주황빛의 철과 용광로에 빠진 노동자의 육체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연결-연루되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지배체계는 자율성과 독립성이라는 말로 복잡한 지층은 납작하고 단순하게 만든다. 마치 압착과정을 거친 슬라브처럼 말이다.
1차 산업혁명을 방직산업이 이끌었다면 2차 산업혁명에는 제철, 제강공업이 있었다. 분업화와 자동화가 도입되면서 숙련된 노동자보다는 미숙련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이 이 ‘뜨겁고’ ‘무거운’ 산업혁명을 이끌었다. 생산과 생존사이에서 노동자와 생산물은 복잡하게 연루된다. 이 작품을 구상했던 2025년 3월에만 포항의 두 제철소에서 각각 노동자가 일하다 목숨을 읽었다. 2025년 3월 14일 현대제철에서 계약직-비정규직 노동자는 쇳물찌거기를 받는 용기에 추락했고, 2025년 3월 21일에는 포스코의 냉연공장 정비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설비에 끼어 묵숨을 잃었다. 희생된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애도하고 싶었으나 아무리 찾아도 노동자들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제철소가 만들어진 이래, 노동자들이 해마다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제철소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의 육체가 녹아내리고, 끼어 죽어 만든 쇳물은 결국 무엇이 되었을까.
제철소의 생산공정은 현대산업의 분업체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분업체계는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과 노동자를 소외시킨다. 분절된 과정의 총체성은 오로지 지배계급에게만 보이도록 설계된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 동력학의 두가지로서, 상품 생산의 증가와 생산의 착취는 ‘사적이고 공적인 현존재의 모든 차원과 결합하고 또 스며든다’고 말한다.
<새로운 천사의 알레고리>는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투명해지는 노동과 노동자들에 대한 애도적 산물로서 구상되었다. 또한 이번 작품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재해석하고 해체한 후 재결합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클레는 지속적으로 천사를 그리는데 집중했는데 그 중, 작품 「 앙겔루스 노부스 」는 발터벤야민이 죽기 직전까지 소유하며 파국을 맞이하는 폐허속에서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하는’ 천사에 대한 사유를 펼치게 하였다.
나는 <새로운 천사의 알레고리>는 녹아내리고 찢겨진 육체마저 자본주의 스펙타클의 물질자원이 되어버린 폐허 속 천사의 모습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게슈탈트’(Gestalt)와 ‘알레고리’(Allegorie)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조형성에 도입하였다. 게슈탈트적 조형은 독립적인 부분보다는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도 부분의 나머지를 보게 한다. 이 작품에서 부분과 부분인 게슈탈트는 곧 알레고리로서 작동하게 된다. 이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이탈되거나 소거된 나머지, 소외되어온 노동자 즉, 타자와 부조리성, 비합리성을 보여주기 위한 조형적 방법론이다.
<새로운 천사의 알레고리>는 크게 두개의 덩어리로 나뉘어져 설치된다. 이는 두 덩어리 사이에 존재했어야할 것을 연상시킨다. 부재함으로서 또는 부분의 나머지가 됨으로서 보이는 형상을 유도한다. 양쪽에 나란히 설치된 두 덩어리들은 각각의 레이어를 형성하고 있고 이 레이어들에서 탈락된 것, 뻥 뚫린 것, 갈리진 틈 사이는 투명한 레이어 사이로 교차되어 또다른 게슈탈트를 발견할 수 있다. 독일어 zusammenhängen은 관계, 연관, 연결의 뜻을 가진 동사다. 여기서 hängen은 ‘걸려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작품은 어딘가에 매달려 있어야지만 연결되고, 의존하며 존재가능한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두개의 덩어리는 모터에 의해 각각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는데 회전의 각도에 따라 두개의 덩어리는 연결된 하나의 형태로 보이기도 하고 독립된 형태로 보인다. 또한 천장에 매달린 조형물 주변으로 스포트조명이 몇 초 간격으로 번쩍거리며 빛을 발광했다가 이내 꺼지기를 반복하게 된다.
전시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아마도예술공간, 서울
기획: 신양희
제작설치: 장호, 김호준